무릅꿇고 주님께 항복하는 면류관을 드리며 항복하는 모습

합당한 항복

은혜 앞에서 내 권리를 내려놓기

로마서 12:1-2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패배, 포기, 체념. 흰 깃발을 들고 손을 올린 채 무릎을 꿇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단어를 멀리하게 됩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항복’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려 합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릅꿇고 주님께 항복하는 면류관을 드리며 항복하는 모습

항복과 투항은 다릅니다

우리말에서 영어의 ‘Surrender’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바로 ‘투항’과 ‘항복’입니다.

투항은 강요에 의한 것입니다. 적에게 둘러싸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외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 항복은 다릅니다. 모든 상황과 정황을 스스로 고려해본 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백기를 드는 것입니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투항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깨달은 후에 스스로 내리는 결단입니다.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 내 인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주인 아래로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항복과 투항은 다릅니다

우리말에서 영어의 ‘Surrender’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바로 ‘투항’과 ‘항복’입니다.

투항은 강요에 의한 것입니다. 적에게 둘러싸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외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 항복은 다릅니다. 모든 상황과 정황을 스스로 고려해본 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백기를 드는 것입니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투항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깨달은 후에 스스로 내리는 결단입니다. 내 삶의 주인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 내 인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주인 아래로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묻지마 헌신’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을 가리켜 ‘너희의 영적 예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바로 λογικὴ λατρεία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요, 이 단어는 ‘이성적이고 합당한 예배’를 의미합니다.

감정에 휩쓸려서 하는 헌신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깨달은 후에 드리는 헌신. 하나님은 우리가 눈 감고 따라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충분히 알고 생각한 뒤, 그 깨달음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헌신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가 담고 있는 무게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라는 작은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 하나가 엄청난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는 앞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고,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 긴 선언의 끝에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드리라.’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항복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장 합당한 반응입니다.

신앙은 ‘착함’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도덕적 개선 프로젝트로 오해하곤 합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고, 더 착한 사람이 되고, 봉사를 더 많이 하고. 물론 이런 변화들이 따라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말은 해방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무거운 짐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유혹할 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얼핏 들으면 굉장한 제안처럼 들립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알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그 유혹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네가 충분하다. 네 삶의 기준은 네가 세워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말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 삶을 통치하려 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내가 옳다고 결정하겠다는 선언. 그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나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인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Earn this”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혼란 속에서 밀러 대위는 단 한 명의 병사를 살리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전장을 헤쳐나갑니다. 전우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마침내 밀러 대위 자신도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 라이언 일병에게 힘겹게 말합니다. “Earn this.” 이 모든 희생을 받아라, 가치 있게 살아라, 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릅니다. 노년의 라이언이 노르망디 묘지에 섭니다. 수없이 늘어선 흰 십자가들 사이에서 그는 밀러 대위의 비석 앞에 멈춥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묻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살았습니까?” 그 장면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는 평생의 짐이 됩니다. 라이언은 가치 있게 살았는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Earn this”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값을 갚으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삶을 내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네 인생은 네가 주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자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내가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담당하려 했던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과 스트레스와 불안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항복할 때 우리는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선하고 완전한 주인 아래 들어가면서 비로소 참 자유를 회복하게 됩니다.

항복은 패배가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항복은 패배가 아닙니다. 빛을 본 사람이 자연스럽게 내리는 당연한 결론이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드리는 가장 합당한 응답입니다.

오늘 하루,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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